제 목   이순신 한산대첩의 구체적인 장소 확인(기사펌)
작성자   신점란 게시일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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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사료가 발굴됐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원중거(元重擧·1719~1790)가 쓴 <화국지(和國志)>(1760년대 저술)에는 “드디어 20여 리(里)를 물러나 한산 북쪽 바다에 이르렀다(遂退二十餘里 至閑山北洋)”는 구절이 나온다. <난중일기>를 국역한 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씨는 “많은 왜선이 처음 머물렀던 견내량에서 20여 리 떨어진, 한산도의 북쪽 바다가 한산대첩이 벌어진 장소임을 <화국지>가 말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통영 미륵산 케이블카에서 본 한산도 앞바다. 바다 건너 한산도가 보이고, 왼쪽의 작은 섬은 죽도, 오른쪽의 작은 두 섬은 혈도이다. 사진의 왼쪽 부분이 <화국지>에 기록된 (견내량에서) 20여 리 떨어진 바다다./박종평 제공


1592년 음력 7월 8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 전선 59척을 격파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이다.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꿀 만큼 엄청난 승리였음에도 지금까지 한산대첩이 구체적으로 한산도 앞바다 어느 지점에서 거둔 승리였는지 불분명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선조에게 알린 ‘견내량에서 왜적을 쳐부순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見乃梁破倭兵狀)’(1592년 7월 15일)를 보면 ‘한산도 바다 가운데(閑山島洋中)’ ‘바다 가운데(洋中)’라고만 나온다. 임진왜란 이후 거의 모든 사료도 이순신 장군의 장계처럼 한산대첩 장소를 개략적으로만 언급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지도상에 특정 지역을 표시했지만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일본의 <와키사카기> 기록과 거의 일치

한산대첩에 대한 기록이 실린 <화국지>는 근세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저술된, 가장 상세한 일본전문서로 알려져 있다. 1763~1764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원중거는 이 책에 일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담았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순신 장군의 1592년 활약을 담은 ‘이충무유사(李忠武遺事)’도 함께 들어가 있다. 박종평씨는 “<화국지>의 ‘이충무유사’에는 기존의 사료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한산대첩의 장소와 상세한 전투 등 새로운 내용들이 실려 있다”고 말했다.

한산대첩의 장소에 대한 <화국지>의 기록은 일본 측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일본의 <와키사카기(脇坂記)>에는 “마침 해협에 적선(조선 수군의 배) 4~5척이 떠 있는 것을 보고는 조총을 쏘며 한 시간 정도 싸움을 걸어, 조금 후퇴하는 적선과 틈을 두지 않고 공격해서 3리 정도 추격했다”(김시덕 번역)는 기록이 있다. <와키사카기>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이끈 주요 장수 중의 한 명인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1554~1626)에 대한 기록이다. 좁은 바닷길인 견내량에서 머물러 있던 왜선을 조선 수군 몇 척이 한산도의 넓은 바다로 유인해 이곳에서 대첩이 이뤄졌다는 내용은 이순신 장군의 장계와 <화국지>, <와키사카기>의 세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

<와키사카기>에서는 견내량에서 한산대첩 장소까지의 거리를 3리라고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의 거리 단위는 우리나라와 달랐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일본의 1리는 우리나라 10리와 같다고 했다. 또한 원중거 <화국지>의 ‘도로’에서는 “일본에서는 1리가 (우리나라의) 10리라고 하나, 그들의 걸음걸이가 조금 짧아 8리가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와키사카기>의 3리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24~30리(9~12㎞)로 볼 수 있다. <화국지>에 기록된 20여 리와 비슷한 거리가 되는 것이다. 20여 리는 ‘여’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8~10㎞로도 볼 수 있다. ‘3리’라는 <와키사카기>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 학계에 일부 알려졌다. 하지만 <화국지>의 기록으로, 이와 일치하는 우리나라의 기록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원 ① ② ③ ④ 지점이 한산대첩의 장소로 추정됐다. <화국지>의 기록으로 보면 연두색 박스 지점이 한산대첩의 장소로 볼 수 있다. <와키사카기>의 기록으로 보면 조금 아래쪽 파란색 박스 지점이다. 지도의 맨윗부분이 물길이 좁은 견내량이다./다음지도


그동안 한산대첩 연구자료에서는 ①통영 해간도 하단, 통영RCE세자트리숲 옆, 방화도 근처 ②통영 화도와 통영항 사이 ③통영 미륵도와 화도, 대죽도 사이 ④통영 미륵도 신전포 포구 하단과 혈도 남단 아래 넓은 바다 등 네 곳이 한산대첩의 장소로 추정됐다. 각 지점을 견내량 신거제대교를 기준으로 거리를 측정해보면 ①은 약 5㎞, ②는 약 7㎞, ③은 약 8㎞, ④는 약 13㎞가 된다. 하지만 근거를 제시한 것은 ④설뿐이다. ④설은 <와키사카기>의 3리를 근거로 들면서 전투는 3리보다 먼, 남쪽 지점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화국지>의 기록으로 본 ‘견내량에서의 20여 리 한산도 북쪽 바다’는 ‘미륵도 통영국제음악당-화도-죽도 선과 미륵도 동래산-동섬 선 사이’(지도 속 연두색 박스)다. 한산대첩의 장소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와키사카기>의 3리(일본 단위) 기준은 <화국지>보다 조금 아래쪽일 수 있다. ‘미륵도 동래산-동섬 선과 미륵도 남산-한산도 문어포항 선 사이’(파란색 박스)다.

■기존의 추정 장소는 모두 네 곳

<화국지>의 ‘제만춘전諸萬春傳)’에는 “내(원중거)가 이충무 계본(啓本) 중에서 그 초사(招辭)를 얻었고”라고 적혀 있다. ‘제만춘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던 원균 막하의 경상우수군 제만춘에 대한 기록이다. ‘이충무유사’와 ‘제만춘전’을 쓰기 위해 원중거가 ‘이충무 계본’ 등을 참고했다고 볼 수 있다. <화국지>의 여러 기록을 분석한 박종평씨는 “‘이충무유사’의 경우,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이 저술한 <이충무공행록>과 이순신 장군의 장계 11편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산대첩의 위치가 기존의 사료에는 발견되지 않기에 원중거가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작성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박씨는 “<화국지>에는 다양한 일본 서적이 인용되어 있으나, 한산대첩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와키사카기>를 원중거가 직접 보지는 않았던 듯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화국지>에 나타나는 ‘한산도 북쪽 바다’라는 부분은 <와키사카기>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그는 “<화국지>의 한산대첩 지점은 왜군 패잔병들이 한산도로 도망쳤다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의 전투 내용과 맞아들어가는 지역”이라면서 “우리나라 기록에서 유일하게 한산대첩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산대첩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드디어 짧은 무기(短兵·창과 칼 같은 것)로 서로 맞붙어 싸웠다.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쳤다. 혹은 갈고리로 물에 떨어뜨리게 하기도 했다. <화국지>의 한산대첩 기록 중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상대의 배(船)에 올라가 직접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추정해보면, 왜군이 조선 수군 전선에 기어오르는 상황에서 조선 수군이 칼과 창으로 공격하는 모습이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는 왜군의 등선백병전(배에 올라 싸움을 벌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정반대로 조선 수군이 화포 공격으로 왜군을 완전히 무력화한 뒤에 조선 수군이 왜군의 배에 올라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 “왜장을 포함해 머리 10급을 베었고”라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산대첩 당시 학익진으로 포위하고 함포로 공격을 하던 가운데 <화국지>의 기록처럼 어느 순간에 우리나라 판옥선과 왜군 전선이 아주 가깝게 접근했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왜군이 판옥선에 기어오르는 상황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기록은 기존의 다른 여러 사료나 <와키사카기>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 새로운 내용이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https://news.v.daum.net/v/20191110090126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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